양문규 시인의 두 번째 산문집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시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 산문집은 양문규 시인이 2009년 봄부터 2015년 봄까지 계간 『시에』에 연재를 하였던 「여여산방(如如山房)에서 보내는 편지」다. 양문규 시인은 천태산 여여산방에서 만 6년 천태산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와 함께 하면서 자연 그대로의 존재방식으로 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 그 작고 보잘것없는 초라한 물상에 눈 맞추며 공동체적 삶의 숨결을 읽어내고 있다.
양문규 시인은 지천명에 이르러 비로소 천태산 영국동의 산채를 얻어 산방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서울생활을 접고 낙향한 이후 집 없이 여러 곳을 떠돌다 산방을 얻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내 생애 가장 큰 일을 이룬 것처럼 가슴 벅찬 행복이었습니다. 비록 작은 토담집이지만 영국사 뒷방지기로 산 이후 그토록 원했던 천태산의 천 년 은행나무와 더불어 함께 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언한다.
그는 스스로 산방을 여여(如如山房)라 정한 후 모든 것을 비워두고 내 것 아닌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스스로 자족하면서 자연의 순리를 좇아 아름다운 삶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 한가운데 천태산 은행나무가 있다. 천태산 은행나무를 스승으로 모시고 “고귀한 생명을 내 일처럼 기뻐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나아가 자신과 이웃, 대자연의 뭇 생명을 지켜내고 가꾸는 소명으로 아름다운 삶”을 꿈꾸며 2009년 ‘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을 설립, 매년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詩祭)’를 비롯해 ‘천태산 은행나무 걸개 시화전, 천태산 은행나무 시 모음집’ 등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이 모두가 “자연 · 생명 · 평화를 공부하는 자리이면서 삶의 향연”을 펼치기 위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양문규 시인이 여여산방에서 생활하는 동안 시련과 고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9년 ‘천태산 은행나무 시제’를 개최하고부터 영국사는 그 다음해 ‘영국사 은행나무 당산제’를 지내기 시작한다. 그 이후 영국사 측은 “은행나무는 영국사 것이니 당연히 이 행사는 영국사만이 해야 된다.”며, 일체의 사업을 하지 말 것을 종용한다. 뿐만 아니라 영국사 측으로부터 “부동산(여여산방)을 철거하고 이를 인도하라”는 소송을 당하기에 이른다. 여여산방 소재의 주택이 영국사 소유의 토지로 그곳에 불교수련원을 짓는다는 연유로 제기했기 때문이다. 양문규 시인은 영국사와 함께 상생의 길을 찾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다하였지만 결국 천태산 여여산방을 떠나게 된다.
현재 양문규 시인은 “비록 천태산 여여산방을 떠났지만 바로 지금 여기가 자연이고 생명이고 평화인 삶의 향연”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거듭나면서 조화로운 삶을 이루기 위해 자연으로 가는 길을 궁구하고 있다.
양문규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명지대 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문학박사)하였다. 1989년 『한국문학』에 「꽃들에 대하여」 외 1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이 있다. 민예총 총무국장, 실천문학사 기획실장, 대전대 겸임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계간 『시에』, 반년간지 『시에티카』발행인, ‘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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